브랜드의 허구는 어디서 역린을 건드리는가

TWG Tea 싱가포르 매장 전경
TWG Tea 매장 — 2008년에 시작한 TWG Tea는 19세기 유럽의 오래된 티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세계를 구축했다.

책도둑은 왜 무너졌고, 어떤 브랜드의 허구는 오히려 가치가 되었을까?

책도둑은 AI 때문에 망한 게 아니다

얼마 전 ‘책도둑’이라는 고전문학 전자책 서비스가 논란 끝에 신규 가입과 결제를 중단했다. 책도둑은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을 번역해 아주 싼 가격에 제공하던 서비스였다. 문제는 번역에 AI를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책도둑 입장문 — AI 번역 활용 사실을 인정한 뒤 책도둑은 전액 환불과 신규 결제 중단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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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자들이 AI 번역 아니냐고 의심하자 책도둑은 AI의 수준이 아직 낮다며 “밤을 새가며 작품을 직접 읽고 수정한다”고 설명했다. 명문대생들이 다듬고 검수하고, 신춘문예 출신 소설가에게도 검수를 받는다고 했다. 이후 AI를 번역 과정에 활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비판이 커지자 전액 환불을 발표한 뒤 신규 회원가입과 결제를 중단했다.

처음 이 사건을 보면서 든 생각은 간단했다.

서비스의 본질은 번역을 누가 했느냐가 아니었는데, 괜히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다 망했구나.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AI를 이용해 기존 출판 방식으로는 경제성이 나오지 않는 수백 권의 고전을 번역합니다. 자동화로 생산비를 낮추고, 필요한 부분은 사람이 검수합니다.”

오히려 훌륭한 사업 설명이다. AI를 사용하기 때문에 싸고, AI를 사용하기 때문에 많은 책을 빠르게 공급할 수 있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여기에 사람이 밤새 책을 읽고 명문대생과 작가가 다듬는다는 인간 노동의 서사를 붙였다.

나는 여기서 꽤 그럴듯한 교훈 하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허구에 기반한 브랜드 서사는 언젠가 무너진다.

그런데 다른 브랜드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브랜드는 원래 없는 것까지 판다

서울의 런던베이글뮤지엄은 런던에서 시작한 회사가 아니다. 2021년 서울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다. 그럼에도 오래된 런던의 어느 베이글 가게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소품, 패키지와 그래픽을 일관되게 구축하며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름에는 심지어 ‘Museum’까지 붙어 있다. (최근 노동 관련 논란으로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지만, 브랜드 서사의 허구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런던베이글뮤지엄 — 서울에서 시작했지만, 공간과 디자인을 통해 오래된 런던의 베이글 가게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이 이름과 공간을 사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런던에서 시작했다고 말한 적도 없고, 실제 박물관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자신들이 상상한 ‘런던’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을 단순히 음식에 덧씌운 가짜 포장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아무 장식도 없는 골방에서 오마카세를 먹는 것과, 조명과 식기와 카운터, 셰프와의 상호작용까지 정교하게 설계된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같은 경험이 아니다. 음식의 화학적 조성만이 상품은 아니다.

그 공간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잠깐 어디에 와 있다고 상상하는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까지 우리는 함께 소비한다. 그렇다면 브랜딩이 만들어낸 허구는 가짜 가치일까?

아니다.

허구가 실제로 사람의 경험을 바꾼다면, 그것 역시 실제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런던베이글뮤지엄에 런던이 없어도 된다. 브랜드가 만들어낸 세계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그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상품의 일부라면 말이다. 브랜드가 만드는 이야기가 꼭 사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덴마크인이 아닌 하겐다즈, 1837년에 태어나지 않은 TWG

하겐다즈는 이 현상을 더욱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Häagen-Dazs라는 단어는 덴마크어가 아니다. 아무 언어에도 없는 조어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아이스크림 사업을 하던 창업자가 유럽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위해 만든 이름이다.

하겐다즈 첫 매장 — 북유럽을 연상시키는 이름과 달리 하겐다즈는 뉴욕에서 시작한 미국 브랜드다.

그런데 하겐다즈는 자신들이 덴마크 회사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증조부가 코펜하겐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창업 역사도 만들지 않았다. 소비자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름과 패키지와 디자인을 본 소비자가 알아서 이야기를 완성한다.

하겐다즈 초기 패키지 — 덴마크 지도까지 사용돼 북유럽의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싱가포르의 TWG Tea는 이보다 훨씬 더 아슬아슬하다. TWG Tea는 2008년에 만들어진 브랜드지만, 오랫동안 로고 한가운데에 1837이라는 숫자를 크게 사용했다. 1837년은 TWG의 창업연도가 아니라 싱가포르 상공회의소가 설립된 해다. 사실인 연도 하나를 가져와, 브랜드가 실제보다 훨씬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장치로 활용한 셈이다.

2012년 홍콩 TWG Tea 매장에 사용된 1837 표기

여기에 금색 로고와 고풍스러운 틴케이스, 19세기 유럽의 티 살롱을 연상시키는 공간까지 더해지면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1837년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차 브랜드인가 보다”라는 이야기를 완성하게 된다. TWG는 1837년에 창업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대신 사실인 숫자와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배치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성을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냈다.

이 정도가 되면 하겐다즈와는 조금 다르다. 하겐다즈는 덴마크라는 이미지를 가져왔다. TWG는 1837이라는 실제 연도를 가져와 소비자가 스스로 “1837년에 창업한 회사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도록 했다.

문장 하나를 집어서 “이것이 거짓말이다”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회사는 1837년에 창업했다고 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실을 어떤 순서와 모양으로 배치하느냐만으로도 사람에게 사실과 다른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있다.

브랜딩은 그 정도로 정교할 수 있다.

여기까지 조사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좋은 브랜딩은 거짓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거짓말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홀리스터를 발견했다.

John Hollister는 존재하지 않았다

Hollister는 2000년 Abercrombie & Fitch가 만든 의류 브랜드다. 그런데 한동안 이 브랜드에는 꽤 구체적인 창업 역사가 있었다.

Hollister가 내세운 ‘California 1922’. 그러나 1922년의 창업자 John Hollister와 그 창업사는 실제 역사가 아니라 브랜드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John M. Hollister라는 사람이 19세기 말에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하고 세계를 여행한 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다. 그의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아 서핑 의류를 만들면서 Hollister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직원 교육에서도 이 이야기가 사용됐다.

문제는 John Hollister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A&F는 Hollister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뒤 Southern California의 해변 분위기에 맞는 스토리를 붙였다. New Yorker는 이 창업사를 소개한 뒤 간단하게 정리한다. “None of this is true.”

여기서 처음 세웠던 가설이 깨진다.

하겐다즈나 런던베이글뮤지엄은 특정한 이미지를 차용했을 뿐, 존재하지 않는 기업의 역사를 사실처럼 말하지 않았다. Hollister는 달랐다. 구체적인 창업자와 그의 인생, 1922년이라는 역사를 실제 회사 연혁처럼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브랜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미 2015년 New Yorker가 이 이야기를 상세히 보도했을 당시 Hollister는 세계 587개 매장에서 연간 2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내고 있었다.

따라서 ‘허구의 서사가 드러나면 브랜드는 신뢰를 잃고 실패한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은 거짓말의 존재 자체를 일관되게 처벌하지 않는다.

나 역시 책도둑 사례에서 너무 쉽게 도덕적 인과관계를 읽었던 것 같다. 거짓말한 브랜드가 실패한 것을 보고, 거짓말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Hollister는 그 둘이 반드시 같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반례였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책도둑과 Hollister는 모두 사실이 아닌 브랜드 서사를 만들었는데, 왜 하나는 치명적인 신뢰 훼손으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았을까.

브랜드의 허구는 어디서 역린을 건드리는가

두 사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Hollister를 산 사람은 John Hollister라는 1922년의 창업자를 구매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산 것은 캘리포니아의 해변, 서핑, 젊음과 성적 매력, 그리고 그 옷을 입었을 때 자신이 어떤 사람처럼 느껴지는가에 가까웠다. John Hollister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그 효용은 상당 부분 그대로 남는다.

오히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John Hollister는 가짜였지만 Hollister가 소비자에게 만들어준 California는 진짜였다.

반면 책도둑의 거짓말은 다른 곳을 건드렸다. “사람이 밤새 읽고 수정한다”, “명문대생이 검수한다”는 이야기는 책도둑이라는 세계를 재미있게 만드는 배경설정이 아니다. 내가 이 번역을 믿고 읽어도 되는가라는 구매 판단의 근거다.

가상의 영국 귀족이 홍차를 마시는 이야기를 만들어도 홍차의 맛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AI가 만든 번역을 사람이 직접 번역하고 검수한 것처럼 설명했다면,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미 읽었던 문장의 품질까지 다시 의심하게 된다.

오마카세집을 에도시대 골목처럼 꾸미는 것은 경험을 만든다. “오늘 아침 도요스 시장에서 직송한 참치입니다”라고 말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 구매 판단을 조작한다. 둘 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사용하지만 성격은 전혀 다르다.

책도둑도 원래는 괜찮을 수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수백 권의 고전을 제공하는 서비스에서 핵심 가치는 가격과 접근성, 책의 수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번역 품질을 의심받자 사람이 밤새 읽고 고치고, 명문대생과 작가가 검수한다는 설명을 내놓으면서 원래 핵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인간의 번역과 검수’를 스스로 신뢰의 근거로 만들었다.

그리고 논란이 터진 뒤에는 사실관계만큼이나 대중이 이 사건을 무엇에 관한 사건으로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해진다. Hollister는 “창업자도 가짜였대”라는 흥미로운 일화에 가까이 남았지만, 책도둑은 “AI를 쓰면서 사람이 검수한다고 거짓말한 회사”라는 훨씬 강한 이야기로 정리됐다.

결국 브랜드의 역린은 고정된 한 줄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비자가 무엇을 샀다고 생각했는지, 그 허구가 그 가치에 얼마나 깊게 연결돼 있었는지, 그리고 문제가 드러난 뒤 어떤 사회적 해석이 형성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브랜드는 많은 허구를 허용받는다. 하지만 소비자가 “나는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돈을 냈다”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허구가 침범하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부가가치가 아니라 배신으로 바뀔 수 있다.

역린은 아마 그 근처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