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은 기능이 아니라 사라지는 일을 산다
최근 학원에서 사용하는 영어 학습 프로그램들의 가격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원아워, 클래스카드, 라즈키즈, 리딩게이트, 리딩팜 같은 서비스들이다. 공개된 요금만 보면 학생 한 명당 월 1천 원대부터 1만 원 가까이까지 다양하다. 학생이 50명이면 학원 한 곳에서 매달 수십만 원을 쓰게 된다.
그런데 원장들은 그 돈을 기꺼이 낸다.
그 사실을 보다가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혹시 원장들이 그렇게까지 불편해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둥바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생당 몇천 원은 기능의 가격이 아니다
영어학원에서 단어시험을 운영하려면 단어를 정리하고, 시험지를 만들고, 채점하고, 틀린 단어를 다시 외우게 하고, 결과를 기록해야 한다.
영어 독서 프로그램도 책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학생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고, 읽었는지 확인하고, 문제를 풀게 하고, 학습량과 결과를 학부모에게 보여줘야 한다.
원장이 사는 것은 화면과 버튼이 아니다.
그 프로그램이 없으면 교사와 원장이 직접 해야 했을 반복 업무와 학습 콘텐츠, 그리고 학부모에게 보여줄 결과를 함께 산다.
학생이 늘어날수록 사라지는 일도 늘어난다. 그러니 학생당 과금이 자연스럽다.
고객이 내는 돈은 개발 난이도보다 그 제품이 없을 때 고객이 직접 감당해야 하는 일의 크기와 더 가깝다.
나는 덜 아픈 문제를 풀고 있는 걸까
어나더클래스의 월 사용료는 이런 영어 학습 프로그램들보다 낮다.
그런데 그 안에는 알림장, 채팅, 출결, 수납, 상담, 사진, 파일 등 훨씬 많은 기능이 들어 있다.
기능이 많다는 사실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고객이 “있으면 편하겠다”고 말하는 기능과, 실제로 매달 돈을 내면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다르다.
사용자가 불편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고통이 큰 것도 아니다. 조금 귀찮지만 카카오톡이나 엑셀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면 지불 의사는 낮을 수 있다.
반대로 기능은 단순해 보여도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없애거나, 인건비와 민원, 학부모의 불만을 줄인다면 고객은 큰돈을 낸다.
여기에서 내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기능이 충분히 많은가”가 아니었다.
이 기능이 고객의 어떤 일을 얼마나 사라지게 하는가.
통합 채널이라는 가치도 있다
물론 학원 관리 서비스는 조금 특수하다.
각 기능만 보면 카카오톡, 네이버 카페, 무료 수납 서비스로 대체할 수 있지만, 학부모가 하나의 앱에서 학원과 소통하게 만드는 것 자체에도 가치가 있다. B2B2C 서비스에서는 필요한 구색을 갖춰 다른 채널을 쓰지 않게 하는 것도 경쟁력이다.
그러니 기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핵심 없이 이것저것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통합이라는 가치가, 고객이 충분히 아파하지 않는 문제를 선택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비타민보다는 진통제
앞으로는 새로운 기능을 만들기 전에 최소한 세 가지를 물어보려 한다.
첫째, 이 기능이 없으면 누가 얼마나 자주 직접 일해야 하는가.
둘째, 해결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것이 단순한 귀찮음인지, 아니면 인건비·누락·민원·퇴원 같은 실제 손실인지.
셋째, 돈을 내는 사람이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지. 교사의 업무가 줄어들어도 원장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과금하기 어렵다.
결국 좋은 기능을 많이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고객이 돈을 내면서라도 없애고 싶은 일을 고르는 것이다.
사업을 오래 했다고 이 질문의 답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흔히 좋은 제품은 비타민보다 진통제에 가까워야 한다고 한다. 앞으로는 기능을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 원장이 돈을 내면서라도 없애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한다.
※ 가격은 2026년 8월에 확인한 각 서비스의 공개 요금표와 기관용 안내를 참고했다. 상품마다 학생별·연간 묶음·기관 견적 등 과금 구조가 달라 정확한 가격 비교보다는 지출 규모를 가늠하는 용도로만 인용했다.
P.S. 알베르토 사보이아의 《The Right It》(국내 번역 제목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은 “잘 만드는 것보다, 애초에 만들 만한 것을 고르는 게 먼저”라는 고민을 다룬 책이다.